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니발 바르카 (문단 편집) === 전후 ===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패배한 뒤, 카르타고는 훨씬 가혹한 조건으로 강화해야 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향후 50년에 걸쳐 1만 탈란트의 거액을 [[전쟁배상금]]으로 납부해야 하며[* 부유한 카르타고 원로원(= 아다림) 의원들은, 이 돈을 자기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내는 대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힘들게 애쓰는 농민들에게 추가로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르타고는 모든 [[식민지]]와 [[제해권]]을 로마에 빼앗겼고, 엄청난 군축도 강요받았다. 카르타고는 해양 국가임에도 3단층 [[갤리선]] 10척만 남기고 모든 함선과 해군 병력을 해체하라고까지 강요받았다. 또한 모든 [[전투 코끼리]]를 로마에 압수당하고, [[함대]]도 [[로마군]]이 확실히 다 탔는지 감시하는 가운데 불태워야 하며 [[아프리카]] 밖의 모든 나라와 동맹 체결 금지 및, 로마의 허락 없이는 어떤 전쟁을 벌이는 것도 금지당했다. 심지어 외침이 임박해도 로마의 허락 없이는 군대를 소집할 수 없었다. 사실상 로마가 카르타고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다. 결국 이 조항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빌미가 된다.''' 한니발은 조국의 생존을 위해 이 모든 가혹한 조건을 카르타고 대표로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로마는 정말 의외로 한니발의 신병을 로마 측에 넘기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두면 패배한 적장은 [[개선식]] 최대의 구경거리로서 퍼레이드에 끌려 나와 사슬에 묶인 채로 로마 시내에서 [[조리돌림]]당하는 게 국룰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마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넣으며 뼛속 깊이 원한을 샀던 한니발이 의외로 이런 관대한 대우를 받은 데에는 한니발을 끝내 패배시킨 젊은 맞수,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의중이 반영되었으리라는 추즉도 있다. 한편 카르타고는 자국의 패장을 상당히 가혹하게 대하는 전통이 있었고, 승산이 희박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석패하고 만 장군이라도 처벌을 피하기는 어려웠으며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대의 여러 사료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뒤 나라가 로마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한 것에 분노한 카르타고인들이 로마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무능과 이탈리아에서 얻은 전리품을 멋대로 사용한 탐욕의 죄로 한니발을 군법재판에 회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은 한니발이 201년 카르타고 집정관(= 수페트)으로 선출되면서, 한니발의 책임은 유야무야되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이 '콘술'이라고 불리나 [[카르타고]]에서는 '수페트'라고 불렸다.] 한니발은 아직 45 ~ 46세에 불과해서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이기도 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수습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내심 국력을 회복하여 로마에 복수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후세까지 전해지는 얼마 안 되는 관련 사료를 종합해보면, 한니발은 로마 원정군을 이끌던 시절에 연마한 [[행정]] 기술을 발휘하여 그가 만약 평생 전쟁이라곤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카르타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집정관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평민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면서도 로마에 [[전쟁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국가 재정을 건실하게 체계화했다. 카르타고가 세금을 늘리지 않고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감사에서 확인된 후, 한니발은 부패를 제거하고 횡령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국가 재정의 재편을 시작했다. 카르타고 상선단이 다시금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여러 지역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상업망을 구축하는 데에도 성공했고, 한니발의 [[개혁]]이 계속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로마에 50년간 갚아야 할 전쟁배상금 1만 탈란트를 10년 만에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지 7년 후, 카르타고의 새로운 번영에 놀란 [[로마인]]들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접촉한 것을 의심하여, 한니발이 로마의 적을 돕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절단을 카르타고에 보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개혁 과정에서 한니발은 또 다시 탐욕스러운 카르타고 [[귀족]]들에게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는데, 한나발이 그들이 틀어쥔 [[권력]]의 일부를 [[평민]]들에게 나눠주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과두제]]적인 [[독직]]의 기회를 제거한 재정 개혁으로 인해 한니발에게는 많은 적들이 생겼다. 한니발이 이끈 카르타고의 부흥은 이에 비하면 그들에겐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로마의 가장 큰 원수가 [[지중해]] 동방의 패자 [[안티오코스 3세]]와 결탁하여 또 다시 로마를 뒤에서 찌르려 한다."고 중상모략하는 편지들이 다름 아닌 카르타고에서 로마 [[원로원]]으로 줄기차게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로마 원로원에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전후에 [[십자가형|십자가에 매달리지도]], 쇠사슬에 묶여 [[개선식]]에 끌려나오지도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의원이 한가득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한니발 때문에 가족친지를 잃었던 이들도 수두룩했다.'''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그가 존경하는 패장을 변호하고자 애썼지만, 그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있었고 한니발이 안티오코스와 결탁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의원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안티오코스와 결탁하여 로마를 침공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한니발을 체포, 처벌하라는 로마 원로원의 요구가 도착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반(反) 한니발파들은 더 없이 기뻐하며 즉시 한니발을 범법자이자 원로원의 적으로 선포했지만 눈치빠른 한니발은 이미 카르타고를 떠난 상태였다. 심지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한니발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의 정적들은 대신에 그가 살던 카르타고 시내의 작은 집을 불사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이제는 남쪽 시골의 농장에 묻혀, 살아갈 길조차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한니발은 [[레바논]] 해안에 있는 모든 [[페니키아]] 민족의 어머니 도시 [[티레]]로 가는 페니키아 무역선 한 척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카르타고로 귀환할 것을 기약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출처: 필립 프리먼 저《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한니발은 [[티레]]를 거친 후 [[시리아]]로 가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 고문이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일은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안티오코스 3세는 육전 [[명장]]인 한니발에게 해군 지휘를 맡기고 자신이 육군을 지휘했다가 둘 다 패배했다. 리비우스의《로마사》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3세는 처음에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에톨리아 출신 신하였던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왕에게도 반기를 들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계획을 철회했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굳이 안티오코스 3세의 실수를 꼽아보라면, '''[[지상전]]의 귀재'''였던 한니발을 해군 지휘에 낭비했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군사적으로는 괴수라서 의외로 해전 지휘력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훗날 [[비티니아]] 해군을 지휘하여 로마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한니발의 주특기인 지상전 지휘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백번 나았을 것이다. 로마도 한니발을 두려워해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의 동생을 사령관으로 뽑고 스키피오 본인을 동행시켜 파병할 정도였다.[* 사실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지병으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는 지휘를 맡지 못 했다.] 하지만 정작 상대는 한니발이 아닌 안티오코스 3세였다. 안티오코스 3세도 나름대로 유명한 왕이었고 [[인도]] 원정까지 지휘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뽑히는 스키피오와 그의 로마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티오코스 3세가 준비한 전력 자체는 꽤나 대단했다. 그는 [[마그네시아 전투]] 직전 한니발에게 그의 군대를 보여주고 평가시켰다. 그는 "이 정도면 [[로마군]]과 맞설 수 있겠냐?"고 한니발에게 물었는데, 한니발은 "'''로마놈들이 탐욕스럽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라고 대답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는 [[헬레니즘]] [[팔랑크스]] 보병과 로마 기병대를 능가하는 동방의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망치와 모루 전술]]에 쓸 '''최강의 모루'''와 '''최강의 망치'''를 준비해둔 것이었다. 당연히 한니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군대의 역량과 별개로 안티오코스 3세의 형편없는 지휘로 인해 셀레우코스군은 패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 기병을 격파한 뒤 로마군 보병 대열의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 본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2천 명 남짓한 수비대에게 반격을 당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왕의 뒤를 따라 [[카타프락토이]] 3천 기도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내 셀레우코스군은 양익이 무너지고 [[포위 섬멸]]당했다.[* 심지어 안티오코스 3세는 약 20년 전 [[라피아 전투]]에서도 거의 다 이겨놓고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역전패당해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안티오코스 3세가 이전에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도 했고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밀어내는 등 군사적 업적이 모자란 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